짝사랑을 끝내야하는 날이 다가 오는 건 알고 있었답니다. 로빈 굿펠로우의 전언



2016년 3월이었을테니, 내가 빌리 아일리시를 처음 본 게 딱 3년이 됐네요.
아니, 처음부터 사랑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죠.
Ocean Eyes는 밍숭맹숭했고, Six Feet Under는 '이렇게 어린애가?' 싶었지만
어린애에 밑줄 그어지는 TP에서나 높이 평가해줬지, 전반적으로는 별로 대단찮게 여겼으니까요.

내가 이 아이의 초기 싱글에서 가장 크게 경계했던 것은, 솔직함의 부재였어요.
그냥, 솔직하지 않다는 게, 자기한테 맞지 않는 엄마옷(좀 더 case specific한 비유로는 오빠옷?)을 잔뜩 꺼내입고도
'아냐, 이거 내 옷이야.' 하고 있는 게, 조금 수상했어요.
물론 그런 종류의 솔직하지 못함이란, 어린애다움일 수도 있지만,
뭔가 집어 말하기 힘든, 내가 경계할만한 어긋남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2017년 2월, 갑자기 벨리에이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죠.
난 그제야 이 아이가 뭘 소화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극광양의 미국식 엉터리 마이너카피'가 아닌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걸 꺠달았어요.
거기서 이 짝사랑이 시작됐죠.

빌리 아일리시는 결코 내가 원하는 노래를 할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벨리에이크는 그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노래였고,
단순히 잘계산된 대중 홍보기획의 일부였지,
결코 빌리 아일리시가 만들고 부르고 싶어하는 노래가 아니었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춘기 어린애 수준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춘기는 인간이 오직 호르몬 하나에 의지하여
성장과 진화의 높고 두터운 벽을 부수고
침팬지 미만의 지능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하는,
놀라운 인간성공의 실례를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격 낮은 음울함으로 가득찬 노래를 들어넘기면서,
난 결코 이 짝사랑이 계속되지 못할 거라는 걸,
이 꼬맹이가 내 기대를 보상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너무 잘 알고 있었죠.
심지어 지금까지 위에 붙인 이 간이 리뷰의 서문을,
2주일 전, 이 앨범을 듣기 1주일 전에 써놓고 있었는걸요.
그리고 앨범을 듣고 또 1주일간, 끙끙 앓으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앨범 나오기 2주일 전에 서문을 다 써놨는데,
정작 리뷰어 카피로 들어본 앨범은 도무지 평할 내용이 없었으니까요.

네, 이건 아주 평범한 정수부 2점짜리 앨범입니다.
모든 사람이 절대로 들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는 아니지만,
기껏해야 하이틴 꼬맹이들 중 자주적인 사고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나 유효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앨범이죠.
그리고, 그래서, 평할 말이 없어요.

내 리뷰에서 2점이나 3점이 흔히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내가 2점이나 3점을 안 주는 게 아니에요.
2점이나 3점 준 문화 산물은 아무런 언급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거죠.
9.6점 만점에 4점은 돼야 깔 가치라도 있고,
1점이어야 그 모든 관점이 정밀하게 고려된,
모든방향에서 완벽한 쓰레기에 경탄하게 되는 거죠.
(사실 실제로 3점 이하의 점수를 주는 경우가 적기도 한데,
이건 그냥 4점도 안 나올 게 뻔해 보이면 거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노래는 30초씩 끊어 듣고 넘겨버리고,
영화나 소설은 어느 정도 신뢰하는 평론가 몇 명의 의견을 참고해 거르죠.
그런데 그렇게 거른 산물에 내가 점수를 매길 수는 없으니까요.)

이건, 결코 그 '모든 방향에서 완벽한 쓰레기'조차 되지 못하는,
그냥 덜떨어진 어린애의 가장된 거짓말입니다.
거기 속아 넘어가는 멍청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이 앨범이 의미를 갖추려면 그런 멍청이가 세상에 아예 없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죠.
문제는 그런 멍청이들이 수천만명 있으니 이 앨범은 쓰레기로서 완벽해지지도 못한다고요.

난 1주일간 대체 이 앨범을 뭐라고 평해야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골라낼 말이 없었죠.

한 트랙 한 트랙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논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 애초에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어떻게 논할 수 있어요?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논할 수 있는 거지,
이건 무슨 부재의 증명도 아니고.

내가 이 꼬맹이에게 어떤 실망을 했는지를 말하려고 해도,
뭔가 딱히, 그렇게 실망하지도 않았어요.
아니, 까놓으면 틀림 없이 이럴거라는 걸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저 앨범 듣기도 전에 만들어놓은 서문에서도 '이렇게 될 지 알았지'라고 가잖아요.
그러니까 물론, 뭐, 1점이나 4점이 되리라는 기대 같은 건 남아있었는지도 모르죠.
설마 2점이겠어? 한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이제와서 '설마 2점일 줄은 몰랐는데....'해봐야 무슨...

그리고 그러니까, 이쯤에서 저 제목을 수정해야겠죠.

짝사랑을 끝내야하는 날이 다가 오는 건 알고 있었답니다. 로빈 굿펠로우의 전언

짝사랑이 끝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빌리 아일리시 데뷔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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