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평소에 일본식 약자를 못 읽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한자를 쓸 때 일본식 약자를 종종 섞어 썼고,
외가 사촌들 중에서 그걸 제대로 읽는 건 나뿐이었다.
굳이 외할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난 일본식 약자를 섞어 쓰는,
일제시대에 기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꽤 많이 겪었고,
딱히 그 사람들이 쓰는 한자를 ‘읽는데는’,
그러니까 정확히 무슨 한자인지는 몰라도 그 음을 찾는데는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간체 중국어 문장을 일본식 한자로 변환해 놓은 걸 보면서,
(고대 중국어는 읽지만 대충 송대 넘어가면서부터는 못 읽기 때문에
내게 현대 중국어 문장은 언어로 인식되지 않고 그냥 해독이 필요한 복합 정보체다.
그것도 간체로 되어 있으면 아예 정보로 인식도 안 되는.)
한참을,
괴린이 뭐지? 하고 있었다.
무슨 처음보는 단어도 아니고 경제였는데 말이다.
経済를 怪悋으로,
모르는 자니까 변은 떼고 방의 음만 추측해 읽으면서
한참을 이해 못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저 단어가 한국어 문장에 섞여 있었다면,
난 저걸 경제라고 읽었을 거다.
그냥 문맥에 맞춰서 대충 글자 생긴 모양만 봤을 테니까.
근데 문맥이 안 잡혀서 글자를 하나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게 괴린으로 밖에 안 읽힌다는 거다.
응. 그건 못 읽는 거지.
한국어 문장에 쓰인 일본식 약자만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냥 한자 섞인 한국어 문장을 읽을 때
자잘한 오타나 잘못 쓴 글씨를 정정해 읽을 수 있다는 거지,
일본식 한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게 아니지.
76.
그냥 좀 싫다.
한국어 가사가 강약 조절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어 노래 중에는 어쩔 수 없이 생목질 해야하는 노래가 많다는 건 이해해.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목질로 일관하는 가수가 많은 거나,
생목질을 ‘꾸밈 없이 담백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을 종종 마주하게 되는 건…
시발 생목질은 노래가 아니라고요.
77.
그러고보니 뒤늦게 알아차렸는데,
난 体을 단 한 번도 한번에 체로 읽은 적이 없다.
물론 분도 아니고 본으로 읽고는,
어…. 음…. 이거 체랍시고 써놓은 거구나 하고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리지.
體 쓸 때는 처음 외우던 그 아홉살 때처럼, 여전히 골곡두, 골곡두 하고 되뇌면서 쓰면서도
體를 体으로 써 본 적도 없어.
웃긴 건 방금 体 입력하려고 한자 불러내면서도 분이 아니라 본이라 치고는
왜 없지? 아니 바로 위에 쓸 땐 있었는데 왜 없지? 하고 있었다.
78.
근래에 스물다섯 살 먹은 애새끼 하나를 나도 모르게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냥 이상하게 신경 쓰이고, 뭔가 필요한 게 있어 보이면
아무 생각 없이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챙겨주는 일이 몇 번 있었다.
평소에 화장 잘하고 잘 꾸미고 다니는 아이인데,
사실 일에 치여 제대로 씻지도 않고 맨 얼굴로 뿌루퉁해 있을 때 눈에 들었고,
그 이후로도 그럴 때만 오히려 알 수 없는 친근감에 반갑게 인사하곤 했다.
연애 감정 같은 것일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뭐지? 하며 스스로 꼴이 우스웠는데…
그냥 얘기하다 뭔가 가슴속 깊은 곳을 아프게 찌르고 지나갔다.
별 것 아니라고 양팔을 흐느적거리며 휘젓는 모양,
그 때 오른쪽 어깨가 들썩여 열리는 모양이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했다.
이 아이에게선 처음 보는 제스쳐였는데 말이야.
M이었구나.
저 화장 안 한 맨 얼굴이 그냥 M이랑 똑닮았고,
많이 큰 키 때문에 그 긴 사지를 움직이는 모양새가 비슷하구나.
저기서 그냥 죽은 옛친구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거였구나.
사실 기억도 안 난다.
20년이나 됐어.
M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텍스트’는 기억나지만,
이미지나 분위기, 강세와 동세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M이 어떤 몸짓으로 어떻게 말하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다.
기억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그게 여전히 새겨져 있고,
그 때 그 나이 어름의 어린애에게 겹쳐 보기까지 하고 있다니.
차라리 연애감정이면 이렇게 민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내 의식이 아니라 (이제는 말라 비틀어진) 호르몬이 하는 병신짓이라기도 하지.
79.
약사의 혼잣말이나 사서정 같은 일본의 여성향 베이스,
중원풍 팬터지 만화를 보다보면 당혹스러운 게,
이 일본인들은 실무행정직이 세습 되는 걸 좀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베트남인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베트남이 과거 도입은 한 박자 느렸어도 가장 늦게까지 과거 시험을 본 동아시아 국가니
아마 베트남인들도 한중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영의정이나 승상 같은 재상직,
혹은 도승지나 상서령 같은 행정 사무 총책이 세습된다는 말을 들으면
뭔 미친 나라냐, 나라꼴이 얼마나 개판이 났길래
그런 미친 권문세도 병신질이 벌어지냐라고 반응을 할 거다.
(물론 실제로 그런 병신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실무행정직은 재상 같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직위라도
원래는 세습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런데 일본인은,
중국 역사를 잘 알아서 저런 직위가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게 아니라면,
저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심지어 저런 직위가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조차,
뭔가 한 박자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들이 가업이나 직위 세습을 다른 동아시아인들에 비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집안에서 해당 업무의 얼개를 파악하고 자란 후계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그 업무의 적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알려진 오류 목록에 올라간지 한참 된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실무행정직을? 어째서? 란 생각이 바로 팝업 되는 걸
과거 제도가 당연했던 동아시아인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일본의 관직과 위계 구조를 잘 몰라서 확신은 없지만,
(뭐 헤이안 시대 초기라든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휘저어 놓은 관위 구조라든가
이런 단편적인 부분은 알지만, 한-송대 중국 관직이나 조선의 관직처럼
어떤 일을 하는 직위가 어떻게 신설, 분리되고 다시 통폐합 되면서
실권이 어디로 옮겨 다녔는지 이런 걸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
모르긴 몰라도, 일본에서도 결국 실무직은 세습 못 시켰을 거다.
세습시킨다면 처음에는 실무직이었더라도 몇 대를 거치면서 명예직, 혹은 단순 관리직화 됐겠지.
당연히, 실무직을 세습시켰다간 행정 대응이 붕괴한다고요.
특히 입법과 행정이 맞물려 돌아가게 해야하는 동아시아 중앙 정부의 고위 행정 관료는
그 인간이 업무 파악을 못한 그 순간 모든 정부 활동이 정지 해버리는 수준인데
뭔 수로 몇 대를 거쳐 세습 시키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