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딴 노래를 대체 왜 듣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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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레나 마를린과 후버포닉과 태러 맥레인과 피오나 애플을 듣던 그 99년.
내 동급생들은 모두 확연히 다른, 그리고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S는 신해철을 중심으로 한국 얼터너티브 락을 들었다.
우린 애초에 서로 듣는 노래를 경멸했다;
C는 클래식만 들었다.
특히 클래식 악기의 위대함에 대해서 나와 가장 말이 통했지만,
결코 말이 통하지 않았다;
K(not that K)는 메탈리카를 숭앙했다.
그리고 역시 서로 듣는 노래를 경멸했다;
T는 린킨 팍을 중심으로 오프스프링이나…
그 갑자기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90년대 말에 유명했던 얼터너티브 락, funk 밴드를 즐겨 들었다.
대체로 서로 우호적인 척 했지만 사실은 서로 경멸했다;
U는 패닉이나 자우림 같은 국내 얼터너티브 영역과
엔싱크 따위의 주류 팝을 들었다.
나는 이적이 좋은 음악가라는 점에,
U는 레나 마를린이 훌륭한 작곡가라는 점에 동의 했다.
그 외에는 서로 듣는 노래를 경멸했다;
P는 하드코어와 인더스트리얼 테크노를 들었다.
이렌 레펜의 나타스 프린세서를 극찬했고,
나와는 좀 극단적인 반대성향에서 비롯하는 유사점이 있어서
불가침 조약 같은 것을 맺었다.
“나는 네가 듣는 노래의 ㅈ같음을 언급하지 않을 테니
너희 장르에서 리드믹한/멜로딕한 노래가 나오면 나한테 가져와 주렴.”

이건 음반을 사서 들어야 했던,
그리고 등하교와 자습 시간 동안 하루에 다섯 시간씩 노래를 들어야 했던
우리 세대의 굴레였다.

우린 백 장을 채우지는 못하는 정도의, 직접 산 음반을,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CD가 긁혀 인식되지 않을 때까지 들었다.

장르가 의미 있었고,
음악가의 브랜드가 의미 있었다.
우린 앨범을 살 때 거기에 어떤 노래가 들어있는지를 듣지 못한채 예측해야 했고,
영화표 두 장과 고등학생 사정에 당연한 3~5천원짜리 저녁식사 두 끼.
즉 한 주말 데이트 비용에 상당하는 돈을 갈라 산 CD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마음에 들게 될 때까지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취향을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남의 취향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린 각자의 이어폰 안에 구분되어 갇힌 채로
오직 스스로의 관점과 대면할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모두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지만,
또한 모두가 그 자신의 관점 안에 갇혀 다들 아래로만 깊이 파고 내려갔다.
그렇기에 서로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지.

우린 서로 노래를 추천하지 않았다.
대충 대학 신입생 때까지는 그런 일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서로 경멸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누구도 서로 노래를 추천하지 않았다.
괜히 감정 쌓일 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남이 추천하는 노래는 진지하게 들어보지도 않았지.

내가 이 블로그에서 정말 거침 없이 노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그런 세대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이 지지리도 소설을 안 읽는 아이들에게,
내가 보르헤스가 대단하다고 말하면 보르헤스를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애들도,
그 픽션들과 알렙은커녕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뭔 얘기를 하고 있는지
감 잡지 못한 애들도
보르헤스를 읽어보고는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겠어’라고 말했다.
결코 ‘대체 이딴 글에 뭔 의미가 있다고?’라며 경멸하지 않았지.
그렇기에 내 세계가 완성된 이후로
난 어디에서도 소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누가 소설 하나만 추천해 달라고 부탁할 때나 윌리스나 김영하 정도의,
타임킬러이면서도 타임킬러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수다쟁이들을 집어내 주는 것 정도 말고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래는 달랐다:
하루 다섯시간씩 노래를 듣는 훈련을 거쳐온 모두가 전문가였고,
모두가 서로의 취향을 경멸했다.
그렇기에 난 노래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 놓아도
누군가 거기에 영향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저 인터넷과 하이퍼텍스트를 모르던 아이들이
보르헤스를 읽게 만든 건 좀 미안하다.
지금은, 미친듯한 양의 쓰레기 정보가 인터넷을 누비고 다니는 지금은,
누구나 바벨의 도서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 모든 정보가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안에서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그 때 저 아이들은 인터넷을 충분히 접한 상태가 아니었고,
인터넷도 가까스로 하이퍼텍스트의 틀을 잡아가고 있던 시대였지.)

그리고 저 아이들을 마주하고는, 당혹해 하는 거지:
학창시절의 하루 다섯 시간을 노래를 듣는데 낭비하지 않는 아이들.
자기 취향을 모르고, 자기 취향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아이들.
그리고 메타 크리티시즘의 압제 아래
자기 취향을 만들지도 못하는 아이들.
나아가서, 심지어는,
이 블로그에서 자기 취향의 초석을 빌려다 깔고 자빠진 아이들.

난 저게 너무나 끔찍해서 참을 수가 없는데,
그 모든 게 저 아이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우리 세대가 너무나 뒤틀려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다만,
그저 다만,
더 이상 장르가 필요 없는 세상,
음악가 브랜드가 필요 없는 세상,
스포티파이의 자동장치가 큐레이팅을 해주는 세상에서;
왜 저 아이들이 평론가 따위의 말에,
무엇보다도 나 따위의 말에,
의미를 두는지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

알고는 있다:
우리의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소리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려는 시도가,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을 불러왔다는 것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열심히 역설했던 그 ‘모든 정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우리가 세상을 이 모양 이 꼴로 망쳐놨다는 것은.
저 아이들은 그저 그 우리가 저지른 죄악의 산물이라는 것은.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다만,

+
근데 지금 되새겨보니까…
나 하드코어 듣는 애들이랑 되게 우호적이었네?
메탈 듣는 애들이랑 진짜 경멸이 뭔지 재정의하는 감정을 주고 받은 반면…
하드코어는 서로 그냥 아 저런 것도 노래구나 재밌네. 하면서 넘어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