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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불멸한다.
가장 모독적이고, 가장 선정적이고,
그에 앞서 가장 뻔한 예술만이 불멸한다.
그 안에 담긴 가치와는 아무 관계 없이.
이에 대해 논하라.
“
언뜻 고교수준 논술 평가 논제 제시문처럼 보이는 이 문장은,
샘 발로우의 여정을 지금껏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랍지 않게도,
샘 발로우의 신작 이모탈리티의 주제문입니다.
아, 물론, ‘언뜻 논술 평가 제시문처럼 보이는’ 거지,
정말로 논술 평가 제시문 같지는 않죠.
일반적으로 우리가 논술 평가 문제를 낼 때는
훨씬 좁은 영역에서 논술을 하도록 유도하거든요.
저렇게 모호하게 가치판단이 어려운 단서들을 달지도 않고요.
뭐, 그건 그렇게 해야 채점하기 쉽기 때문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네, 이건 지나치게 넓은 논제입니다.
저 논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무엇인가부터 논하기 시작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술의 내재 가치가 무엇인가부터 논하기 시작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늘 그렇듯이, 돈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저 논제는 정답이 있기는커녕 논의점조차 하나로 모이지 않는 질문이 됩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사람과 예술을 파는 법에 대해 논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논쟁이 성립할 수 있나요?
저 논제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조차 성립하지 않기에,
이 게임은, 샘 발로우의 게임이 늘 그렇듯, 지독하게도 개인적인 게임이 됩니다.
샘 발로우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플레이어가 게임의 주인공을 플레이하지 말고,
스스로 게임의 주인공이 되기를 요구했습니다.
게임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에서 형사수첩을 펼치고 (물론 나는 실제로 종이에 기록하기보다는
모니터 구석 구석에 스티커 노트를 붙이는 쪽을 선호하지만 어쨌든)
게임이 보여주는 정보를 꼼꼼히 기록하면서 정리하고 추론하여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게임을 만들었죠.
그리고 이 게임은, 기존의 샘 발로우 문법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둘러쳐진 혼란스러운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저 게임의 주제문을 찾는 것을
게임의 첫 단계, 혹은 첫 두 단계로 만들어 놓았거든요.
그렇기에 게임의 이 ‘개인적인’ 속성은 전작들보다 훨씬 강화되었습니다.
전작은 그래도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끼리 의미 있는 논의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렇지 않아요.
당장 내가 저게 이 게임의 주제문이라고 선언하면
‘마리사의 영화들이 개봉되지 않은 이유를 찾는 게임이 아니었어?’
혹은 ‘불멸자와 다른존재의 뒷 이야기를 파악하는 게임이 아니었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예술, 좀 더 좁게는 이야기의 불멸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더럽다고 물로 씻겨도, 불온하다 십자가에 못박아도 살아 남습니다.
불에 태우는 것은 어느 정도 유효해 보이지만,
인류사의 숱한 분서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그 책을 태우던 어떤 권위들보다도 오래 살아 남았습니다.
기껏해야 이야기와 비슷한 불멸성을 가진 권위는 종교 정도인데,
샘 발로우는 이 게임 전체에서 종교도 결국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독자의 머릿속에 욱여 넣습니다.
(사실 이 ‘종교도 결국 이야기다’를 공리로 삼는 방식은
이 게임 안에서 가장 세련되지 못한 부분입니다.
정말로 저걸 공리로 삼으려면 훨씬 더 뻔뻔했어야 합니다.
‘이게 종교 모독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럽지만
누구누구는 종교도 결국 이야기라고 하고,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가 아니라
‘종교는 이야기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언급해야하는지조차 모르겠다’가 됐어야 했어요.)
이모탈리티는 그 이야기의 불멸성에 관한 다양한 논점을
이 불멸자의 삶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독자에게 던집니다.
예술은 독자 없이 성립, 존재할 수 없는가?
없다면, 그 의존도는 얼마나 되는가?
예술은 독자를 선도하는가, 독자가 예술을 이끌어 내는가?
예술이 불멸의 가치를 만드는가? 독자가 불멸의 예술을 만드는가?
예술성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내재된 가치란 무엇이고,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는 내재 가치에 존재 의미가 있는가?
표준적인 대중이 좋은 독자인가,
예술의 숨겨진 가치를 잘 알아보는 것이 좋은 독자인가?
뭐, 표면만 훑어도 끝이 없군요.
문제는, 저 질문들의 깊이가 전적으로
플레이어 개인의 예술관과 철학에 의존한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지금 위에 꼽아놓은 표면적인 질문의 아래층으로는 내려 들어가지도 못할 겁니다.
당장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는 것만도
십수년간 꾸준히 저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자신의 세계관, 예술관, 가치관과 현실 세계의 충돌을
조정하고 또 조정한 뒤에야 할 수 있는 일인데,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문화예술계 밥을 10년 넘게 빨아 먹고 있는 불한당들이거나,
10년 넘게 밥벌이 없이도 어떻겐가 살아 남은 날백수 무뢰배들이거나,
평생 밥 굶는 걸 걱정해본 적 없는 유한계급 기생충들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저 아래에 놓인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서는
이 표면적인 질문에 먼저 답을 달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죠, 샘 발로우는 언제나 플레이어의 세계관 안에서
완전히 개인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개인적인 게임을 만들어왔습니다.
당장 허 스토리부터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아서
그냥 첫 영상을 보고 게임을 끄는 것’도 게임의 엔딩으로 취급했죠.
이모탈리티 역시 마리사 맥거핀에 낚여서
그냥 영상들만 찾아다니며 마리사의 진상을 추적하든,
불멸자 맥거핀에 낚여서
백워드 트래킹만 열심히 하며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헤매든,
이 대체 무슨 의미 없는 헛소리냐 하며 바로 게임을 끄든,
플레이어 자신의 예술관을 보강하고 표명하는 게임플레이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모탈리티가 무슨 게임인가,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은,
누군가 짧게 요약해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게 됩니다.
더 정확하게는, 플레이어 본인이 느끼고 해석한 그대로의 게임이 되어
전달할 수 없게됩니다.
누누이 이 게임이 지독하게 개인적인 게임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냥 헛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똥겜 같다면,
맞습니다, 그런 게임이에요.
마리사의 이야기를 추적하다 길을 잃게 되는 느슨하고 불친절한 게임 같다면,
맞습니다, 그런 게임이에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예술적이고 어려운 게임 같다면,
맞습니다, 그런 게임이에요.
인류 역사에 남을 완벽한 예술작품인 것 같다면………..어….. 어….. 어……..
아니 솔직히 그건 아닌 것 같지 않아요?
이모탈리티가 요구하는 게임플레이는,
이 게임을 접하고, 자신의 예술관을 되돌아보고,
변경할 곳이 있으면 변경하여, 다시 정립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뿐입니다.
마리사의 배우 커리어가 왜 그렇게 엉망이었는지 그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고,
불멸자와 다른 존재가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
세부사항을 파헤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앞서 주제문이라고 뽑아놓은 논제에 참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당연히, 굳이 찾지 않을, 파헤치지 않을, 참여하지 않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나아가서 보고 싶은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싶은 그대로 받아 들이라는 것이 이 게임의 요구입니다.
다시, 조금 좁은 영역으로 되돌아와서,
이 게임은 그 수행이 깔끔한 게임은 아닙니다.
저런 포스트모던한 게임플레이를 목표로 두었다면,
좀 더 세련되이 다듬어야 할 부분이 여럿 있어요.
하지만 그런 부분을 조명하는 것은
1972년에 퐁의 비디오 게임으로서 세련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우린 저걸 어떻게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런 게임을 만들어본 적도, 플레이해 본 적도 없어서 제대로 지적할 수가 없어요.
허 스토리가 나왔던 2015년, 우리는 이게 1995년에 만들 수 있었던 게임인데
20년이나 늦게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지금쯤이면 우리가
제대로된 허 스토리 비평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허 스토리와 비슷한 시도라도 한 게임은
스티븐의 소시지 롤과 파이어 정도가 고작이고,
(폴른 오더의 ‘플레이어가 플레잉 캐릭터를 돌아서게 조작하는 게 아닌,
플레이어 본인이 돌아설 때 서사가 반전되는’
미묘한 텔링 구조 역시 ‘시도는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대규모 서사가 필요한 중대형 게임의 한계라고 해도
그렇게 좁은 영역의 텔링 구조를 살짝 꼬아놓은 것을
이런 플레이어가 등장인물에게 이입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네요.
사실 파이어는 정말 말도 안되는 대규모 서사에서
파리한 페이(혹은 시시한 셰이, 혹은 헝클어진 케이, 혹은…)의 해방이라는 과제
하나만으로 저걸 성공시켰는데도,
결국 독자가 게임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 때문에 그저 시도라고 말하는데,
폴른 오더 정도의 독립장치를 시도라고 말하기는 뭐하죠.)
샘 발로우는 저 멀리 달려가서 더욱 더 비평할 수 없는 게임을 안겨주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게임이었고,
인류 모두가 한 번은 플레이해 볼 가치가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임은 아닌 것 같고, 플레이 해 보고 싶지 않다고요?
그렇다면 애석하게도:
(그 누구도 업적이나 트로피나 게이머 점수를 챙겨주지는 않겠지만)
당신은 이미 이 게임을 한 번 플레이한 겁니다.
어디가서든 거리낄 것 없이
‘이모탈리티? 나 그 게임 엔딩 봤는데 나랑 안 맞더라’라고 말해도 됩니다.
분명히, 그 역시 이모탈리티를 접하고 나서
자신의 예술관을 다시 정립하는 행동을 한 거니까요.
이렇게 이 게임에 관한 정보를 대충 훑어보고
‘난 이런 게임 딱히 하고 싶지 않아’라고 결정하는 것조차
게임이 요구하는 궁극적 게임플레이의 완성이라는 것이,
이 게임을 완성시킵니다.
쉬이 무의미해질 수 있는, 대중과 지나치게 괴리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
―― 모든 독자의 해석을 존중하지만, 어떤 독자도 존재하지 않는 ――에서
스스로 구해내 존재 자체를 의미 있게 만듭니다.
+
사실 이 게임의 완성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게임패스 데이 원 발매 계약입니다.
허 스토리나 텔링 라이스와 달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뭔 게임인지라도 알아볼까?’ 하는 영역에 발을 들인
결정적인 이유가
게임패스 데이 원 발매이니까요.